, 빛, 별의 존재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변증법

 

안진국 (미술비평)

 

 

무엇을 그린다는 것은 상당히 철학적인 문제다. 누구든, 어린아이조차 쉽게 무언가를 그려낼 수 있기에 그린다는 행위는 너무 쉽고 간단하고 익숙한 것처럼 보이지만, ‘무엇을 그릴 것인가’, ‘어떻게 그릴 것인가’는 미술가가 평생을 두고 고민하는 문제이며, 철학자에게는 예술 체제(régime des arts)에 대한 사유를 끌어내는 문제이다.

임지현의 작업은 예술 체제의 교란 속에서 변증법적인 면모를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체계화된 미메시스(mimesis)로서 재현, 즉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린다는 재현적 예술 체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재현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등을 분할하며 고유한 재현의 규범을 만들었다. 이런 재현적 예술 체제는 미학적 예술 체제, 즉 ‘미학’이 등장하면서 파괴되었다. 미학은 독일어로 Ästhetik, 영어로 aesthetics, 프랑스어로 esthétique로서, 엄밀한 의미에서 ‘감각학’ 혹은 ‘감성학’이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재현 체계에서 재현될 수 있는 것은 보이는 것, 그중에서도 사회적 이성에 의해서 중요하다고 인식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학에서는 ‘감성적인 것’ 또는 ‘감각적인 것’, 즉 재현 불가능한 것을 재현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그래서 자크 랑시에르는 예술의 미학적 체제 안에서 “재현할 수 없는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 임지현의 작업에서 예술 체계의 변증법적 면모는 재현과 감성의 경계가 모호하게 작동하면서 형성된다.

 

 

모호한 재현과 감성의 경계

 

“일상적인 삶에서 늘 지니고 있었던 ‘명확한 것이 없다’는 생각은 ‘회색’으로 귀결되었고 그 회색의 바탕을 딛고 색채의 회화로 나아간다.” - 작업노트(2021) 중

“결국에 나의 작업은 그 무엇도 명확하지 않다는 두려움을 그대로의 형상으로 드러냄으로 자신을 진정시키는 행위인, 살아감의 주요한 방식이다.” - 작업노트(2008) 중

 

“명확한 것이 없다/명확하지 않다”라는 임지현의 언급은 그의 작업을 아우르는 핵심 문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단어이자 색상이 ‘회색’이다. 회색은 작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계’에 대한 함의를 담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그의 사유는 그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재현과 감성의 모호한 경계, 즉 예술 체제의 변증법적 면모가 갑자기 등장했거나 순간적인 선택이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임지현의 초기 작업부터 현재의 작업까지 대부분 작업에서 드러나는 형상은 재현에 목적이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그 작업들이 재현적 면모를 지닌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현재(지금-여기)’만을 응시하며, 선과 점, 색채의 흔적을 남기는데 집중하는 작업 과정을 보인다. 자신의 내면에 응축된 감성을 화면에 흔적처럼 남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작업의 끝에서 어떤 재현적인 형상을 만나게 된다. 작가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아라크네(Arachne)에 빗대어 ‘예술가가 실을 짜는 아라크네와 같다’(작업노트, 2008)라고 말했다. (2008년 개인전 제목이 ⟪아라크네⟫였다.) 그에게 선, 점, 색채 등은 하나의 실과 같고, 한 선 한 선, 한 점 한 점, 한 색 한 색을 긋고, 찍고, 칠하는 게 중요해 보인다. 쉽게 말해서 현재의 순간에 행하는 긋는, 찍는, 칠하는 몸짓과 그 흔적이 그 순간의 감정이며, 그 감정들을 실을 짜듯 계속해 나간 결과물이 작가에게는 작품인 것이다. 하지만 실을 짜는 일은 천(직물)을 만드는 일로, 옷을 만드는 행위는 아니다. 단지 옷을 만들기 위해 천을 준비하는 단계일 뿐이다. 그래서 실을 짜는 일과 옷을 만드는 일은 다소 거리가 있다. 실을 짬으로써 바로 옷이 되지 않는 것처럼, 순간순간의 감정을 담은 선, 점, 색채가 바로 어떤 (재현된) 형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뜨개질의 경우, 그 완성이 목도리, 장갑, 옷 등으로 이어지지만, 이를 위해서는 정확한 계획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정확한 계획에는 늘 제한과 과잉이 따르기 마련이다. 목적을 가진 뜨개질은 언제나 결과물을 떠올려야 하며, 그만 짜야 하는 지점(제한)과 완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계속 짜야 하는 지점(과잉)이 존재한다. 이것을 시각 예술로 바꿔보자면, 선긋기, 점찍기, 채색이 그 순간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재현의 목적을 가지고 결과물을 얻기 위해 제한과 과잉의 굴레에서 직조해야 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임지현은 그 결과물의 형상, 즉 재현보다 선, 점, 색채의 순간적인 표정과 그들의 엮임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실을 짜는 것(감정)이 중요하기에 옷의 모양(재현)은 그에게선 먼 곳에 있다. 실을 짜는 것은 반복의 연속이다. 작가의 작업에서도 반복은 중요하다. 반복된 선긋기, 반복된 점찍기, 반복된 채색 …. 이 행위들은 찰나의 순간을 겹겹이 쌓는 것을 통해 시간의 흐름과 순간들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먼저 그은 선과 지금 긋는 선, 그리고 다음에 그을 선의 모양이 그리 다르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찰나의 순간은 이웃한 찰나의 순간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의 흔적들도 서로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임지현의 작업은 조금 길게, 조금 짧게, 조금 더 휘어지게, 조금 더 직선으로 등등 약간의 차이를 보이며 찰나의 순간과 감정의 선들이 반복된다. (점들이나 색채들도 마찬가지다.) 이 반복은 임계점에 이르렀을 때, 즉 단절의 필요성이 느껴졌을 때, 다른 단계로 넘어가며 새로운 변주를 일으키게 되고, 이러한 과정을 거듭 거치면서 작품으로 완성된다( <La fin des années> [2006], <L'ALLURE BLUE> [2007], <YOUR BAROQUE-0> 시리즈 [2007], <ARACHNE> [2008], <TRA-LA-LA> 시리즈 [2008], <기기묘묘>[2013], <회색의 연습>[2017] 등). 참고로, 작가의 작업에서 반복은 중요한 특징인데, 작가는 선/점/색채의 반복뿐만 아니라, 형식적인 층위에서도 반복을 자주 사용한다. 달을 반복적으로 그린 <70개의 회색 달>(2018)과 동일한 오브제를 반복적으로 쌓아올리거나 배열한 <솔직한 기념물>(2015)과 <검은색-회색-흰색의 조각>(2015), <가상의 구조>(2015), <침묵의 구조>(2018) 등에서 반복의 형식을 발견할 수 있으며, 『PRACTICE OF GREY』(2017)나 『JE VOIS』(2016) 같은 책 작업도 반복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감정의 흔적들은 다수가 어느 순간 재현적인 형상을 하게 되는 지점에서 마무리되거나, 또는 작품의 제목을 통해 재현의 형상임을 암시하는 상황에 이른다. 선/점/색채들의 엮임이 사람이 되기도 하고([2006], [2007], <표류>[2007], [2015], <어이상실>[2015] 등), 숲이 되기도 하고([2015], <검은 숲>시리즈[2015] 등), 정원(<당신의 정원>[2009]), 무대 및 배우(<극장>시리즈[2010], <배우>[2009]), 물고기(<심해어>[2009]), 나무(<밤의 꽃나무>[2016]), 꽃잎(<낙화>[2017]), 책(<끝 없는 텍스트>[2014], <추락>[2014]) 등이 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밤하늘이나 우주를 연상시키는 형상으로 귀결되곤 한다. 목적 없는 감정의 흔적들이 쌓이고 증식하여 재현의 형상, 즉 목적을 가지고 그린 형상처럼 나타나게 되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 빛, 회색: 존재들이 드러나는 시간

 

“밤의 고양이는 모두 회색이다(La Nuit Tous Les Chats sont Gris)” - 『Practice of Grey』, p.6.

 

다시 “명확한 것이 없다/명확하지 않다”를 상기해보자. 임지현의 작업이 재현과 감정의 변증법인 것은 여기에 있다. 미학에서 “재현할 수 없는 것은 없다”는 랑시에르의 말처럼, 감정은 임지현의 작업에서 재현된다. 일반적으로 시각 예술에서 어떤 대상을 재현한다는 것은 선/점/색채들을 제한하거나 과잉 사용하여 직조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감정 재현은 직조의 차원에서 형상 만들기라는 통상적인 재현이 아니다. 선 하나, 점 하나, 붓질 하나의 흔적은 순간의 감정에 대한 시각적 번역이고, 찰나의 감정에 대한 재현이다. 즉 각각의 선/점/색채 등은 무형의 감정이 시각적 형태로 번안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번안은 불완전하고, 온전하지도 않으며, 규칙을 찾기도 힘들다.) 이러한 번안들의 축적은 앞서 말했듯이 어떤 무정형적 형상이 되기도 하고, 사람이나 숲, 밤하늘, 우주 등이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이 번안들의 축적은 유동적 형상을 불러온다. 이것은 작업이 시작될 때, 형상에 관한 잠재태가 없다는 의미다. 임지현의 작업은, 구체적 형상을 재현하겠다는 목적성을 가진 몇몇 작업(<70개의 회색 달>, <회색의 바탕>[2018], [2018], [2018] 등)을 제외한다면, 사실상 ‘명확한 것이 없이’ 시작되는 듯하다. 감정의 선/점/색채의 집적이 어떤 형상으로 화면에 떠오를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작업은 유동적이다. 모든 것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는 감정의 흐름은 인지 가능한 수준의 형상으로 귀결되기도 하고, 그저 연상되는 수준에 머물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 작가가 제목을 통해 형상을 호명함으로써 그 형상이 된다(<당신의 정원>, <극장>시리즈, <배우>, <심해어> <낙화>, <가을>[2009] 등)— 결국, 보이지 않는 감정은 보이는 형태로 번안(재현)되고, 이것의 축적은 추상과 구상의 경계에서 감정의 덩어리와 구체적 명칭을 지닌 형상(재현) 사이에서 진동하며 우리를 교란한다.

이러한 교란, 혹은 모호한 경계, 혹은 변증법적 면모는 그의 작업에서 시각 예술의 근원적 문제와 맞닿아 있다. 바로 ‘본다’라는 문제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본다는 것-시선’에 대한 질문을 바탕으로 … 표현된다”(작업노트, 2021)라고 말한다. 그는 ‘나는 본다’라는 프랑스어 표현인 ‘JE VOIS’를 2006년 작품 제목으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2016년 발간한 3권(WHITE TEXT, GREY PAINTING, BLACK MONITOR)으로 구성된 책의 제목으로도 사용한 바 있다. 또한, 두 개의 구멍 같은 흰 원을 자주 등장시키면서 어떤 존재가 화면 밖을 응시하는(“나는 본다”)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그림을 자주 그려왔다. 이 두 개의 구멍은 달로 표현되기도 하면서 빛으로 변주되기도 한다(<두 개의 달>[2016], <두 달의 빛>[2017] 등). 그런데 이 구멍의 정체는 사실 명확하지 않다. 눈이기도 하고, 빛이기도 하고, 달(행성)이기도 하다.

보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하다. 빛에 의해 우리는 사물을 식별하게(보게) 되고, 그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JE VOIS’는 영어의 ‘I see’처럼, ‘나는 본다’와 ‘나는 이해한다’는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그런데 정말 본다는 것이 이해하는(아는) 것인가? 이 모호함 때문에 작가가 낮이 아니라 밤을, 태양이 아니라 달을 선택한 것이리라. 빛의 거대한 형체라면 발광체인 태양과 반사체인 달을 떠올리게 된다. 태양빛은 모든 색을 명확하게 드러나도록 하지만, 달빛은 그렇지 못하다. “밤의 고양이는 모두 회색이다.” 어쩌면 본다는 것은 달빛 아래에서 사물을 회색으로 인지하는 수준인지도 모른다. 온전히 알 수 없다(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다. 따라서 본다는 의미의 ‘눈’과 어두운 밤의 ‘달’을 연결하는 것은 보는 것과 아는 것의 틈새를 벌리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사물을 회색으로 인식하게 하는 밤의 빛(달)과 눈동자가 없는 눈은 보고 있으면서도 알 수 없는 상황의 불안감과 두려움이 스며 있는 게 아니겠는가. 작가는 말한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안다’와 ‘나는 모른다’를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가는. 나는 후자이다.”(작업노트, 2016)

 

 

별들: 관계의 성좌

 

“나의 작업은 늘 ‘관계’에 대한 질문이었다. 관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어떻게 지을 것인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색은 없다. 다만 어떻게 관계지을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 작업노트(2021) 중

 

“나는 모른다”, “명확한 것이 없다/명확하지 않다”에 기반을 둔 교란, 모호한 경계, 변증법적 면모로의 귀결은 임지현의 ‘관계’에 대한 사유가 주요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색은 없다.”는 그의 말처럼, 그는 어떤 연합도 가능하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관계 맺기 전까지 ‘모르고 명확한 것이 없다.’ 이는 사회적인 위계와 차별에 대한 작가의 견해를 드러내는 발언인 동시에, 표현 방법에 관한 발언이기도 하다. 몇 해 전까지 줄곧 작가는 회색에 관한 탐구에 주의를 기울였다. 사실 회색에 관한 탐구 또한 관계에 관한 탐구이기도 하다. 흰색과 검은색의 사이에서 이 두 극단이 맺고 있는 관계와 그 중간의 의미와 범주의 역할 등에 대한 사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의 탐색은 최근 다양한 표현 도구와 색채의 관계 맺기 방식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유동적이고 유연한 관계로 맺어진 연합체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러한 사유를 조형적으로 보여주려는 듯 작가의 최근 작업은 형형색색의 우주 속에 반짝이는 별들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어쩌면 이것은 별이 아니라 ‘눈’일지도 모른다. 우주가 아니라 숲이거나 밤일지도 모른다. 사실 이 공간은 어떤 곳으로 규정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별처럼, 혹은 눈처럼 보이는 둥글거나 뾰족한 구멍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빛나는 듯 보인다는 점이다. ‘개별적인 존재’로서 공존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밤하늘에 있는 별들을 서로 이어 서사를 만든 성좌(별자리)를 떠올려 볼 수 있다. 개개의 행성이 위계적 관계에서 종합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 맺기를 통해 연합함으로써 유의미한 이야기가 창발 되는 것이 성좌이다. 밤하늘의 별들을 이어 성좌를 만들 듯이 작가는 명확하지 않은 다양한 존재(감정, 표현방식, 색, 도구, 형상 등)를 연결하여 새로운 관계 속에서 하나의 연합체를 구성함으로써 작품의 화면이 다양성을 포용하는 공존의 장이 되도록 이끌고 있다.

 

임지현은 “세상의 모든 색은 검은색과 흰색-어둠과 빛 사이에 존재한다.”(작업노트, 2021)라고 단언한다. 그는 검은색과 흰색,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회색을 탐색했고, 밤이라는 어둠과 달(혹은 눈)이라는 빛을 작업에서 줄곧 보여줬다. 이제 검은색/흰색, 어둠/빛으로 응축되어 있던 세상의 모든 색을 화면에 펼쳐놓고 관계 맺기를 통해 그것의 감성적 울림과 모호한 형상을 우리에게 드러낸다. 그는 여전히 ‘모른다.’ 작가에게는 ‘명확한 것이 없다.’ 이는 다른 말로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이후의 작업은 작가의 감성이 어떤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화면 위에 안착될까? 모르기에, 명확한 것이 없기에 벌써부터 기대된다.◎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