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 틈을 남겨두기
한윤아(기획자, 타이그레스 온 페이퍼 대표)
동그라미, 구멍인.
임지현의 동그라미 패턴은 작업 안에서 지속되는 속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2015년 작, 일련의 <검은 숲> 작업에서 나타난 두 개의 빛나는 동그라미가 <두 개의 달>(2016), <두 달의 빛>(2017)으로 이어진다. 달의 회화는 책 작업(『70개의 회색 달』, 2018)으로도 완성되었다. 또한 두 개의 빛나는 동그라미는 <산-구름>(2016)처럼 여러 개로, 또 <무덤>(2016)처럼 집합체로도 나타난다. 검은 세계의 흰 구멍인 동그라미는 밤 벚꽃(<밤 벚나무>, 2018), 꽃무덤(<낙화>, 2017), 혹은 밤바다를 가득 채운 진주와 같이 흩어진 추상(<회색의 연습>, 2017)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지속은 선형적 시간이나 인과 관계의 시간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단속斷續’하는 출현, 즉 끊어지고 이어지며 나타나는 것이다. 우선 ‘끊어지고 이어진다’는 말은 작가의 시간이라는 측면에서도 유용한 말이다. 임지현의 2008년 첫 개인전, 스스로 작업의 전환시기라 부른 2015년, 그리고 2018년의 전시와 이번 2022년 개인전에 이르는 동안, 작가의 바이오그래피는 마치 점선처럼, 잠복해있는 시간과 표현되는 시간, 사회적으로 재현되는 시간이 교차한다. 여기서 마치 ‘사건’처럼 드러난 작업들에는 동그라미로 구성되기 전의 잠재적 형태가 있다. <그 시절의 끝>(2006)이나 <싸움>(2007)처럼, 이는 가는 선들 사이의 틈이거나, 찍은 점과 점 사이의 여백이거나, 덮어 칠하지 않은 밑그림의 흔적이기도 하다.
임지현은 선, 검정, 색 등 조형의 방법이나 재료에 대한 탐구를 바탕으로, 여성으로서의 시간을 지내는 동안 자신이 가진 물적 조건 안에서 힘껏 그려내는 작가이다. 감히 신과 싸움을 벌인 장인이자 예술가의 이름을 딴 2008년 작 <아라크네>에서, 거미가 토해낸 듯 가늘고 섬세한 검은 선들은 그것이 곧 드러낼 형상을 예고하리라는 기대를 깨버린다. 작가 스스로 “무엇이 될 지 모르는 것을 그린다”고 한 고백 때문은 아니다. 거미가 생산한 것은 거미에게 분리된 대상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거꾸로 거미가 그 줄 위에 머물며, 동시에 줄은 거미의 감각 기관이자 신체의 연장이 된다. 실제로 거미줄이 거미의 고막의 역할을 하듯, 작업의 수행과 재료라는 물질, 그림 모두 작가의 신체와 떨어뜨릴 수 없다. 이렇게 드러난 구멍들은 2015년의 프로젝트 ❮검은 숲 Black Forest❯과 전시 ❮사각의 숲 Blind Spot Forest❯을 통해 마침내 구체적인 신체의 일부, 즉 ‘눈’으로 형상화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 눈을 가진 구체적 형상은 사람일까? 짐짓 그런 체 할 뿐이고 자신의 모호함을 감추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정체성을 잘 모르지만, 자신의 현존은 부정하지 않는다. 이 존재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 〈엉클 분미〉에서 정령에 이끌려 숲으로 들어갔다가 빨간 눈만 남은 털원숭이가 된 아들과 닮았고, ‘전생을 모조리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순환적 시간을 사는 분미 삼촌의 정체성과도 비슷하다. (임지현은 영화 〈엉클 분미〉를 아직 보지 못했다고 하지만) “눈을 뜨고 있지만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고 말하는 분미는 본 것을 확신하지 않는 대신, 여러 겹의 기억으로 여러 존재를 만날 수 있으며, 과거와 미래를 연결시킨다. 임지현이 구멍을 ‘눈’으로 치환하던 이 시기엔 시각성이나 ‘보기’의 문제를 좀 더 다룬다. 보는 존재로서의 화가의 자의식이 담긴 작업으로 『JE VOIS(나는 본다)』 (2016)라는 출판물을 만든다. 이 작업은 검정, 흰색, 회색으로 만든 3권의 책이 하나의 시리즈로 묶여 있다. 각각의 책은 회색의 드로잉, 검정의 온라인 레퍼런스(기사의 제목), 흰색의 글쓰기로 분리된 세 개의 ‘창windows’ 을 보여준다. 작가는 마치 천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처럼 동시에 여러 개의 눈을 작동시키지만, 본 것을 하나로 통합하여 통일된 주체성으로 구축하지 않았다. 회화가 보여주는 신비로움, 분노의 정동을 만들어내는 레퍼런스, 정확한 글쓰기는 모두 작가의 일부일테지만 또 총체적인 모습이 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이 작업은 근대의 ‘보기’ 혹은 단안 원근법의 특권적 위치에 대한 논평이 될 수 있다. <검은 숲>의 눈이 초월적 시선이 아닌 ‘맹점blind spot’이며 사각지대이듯, 임지현의 보기 감각은 위치에서 벗어나는 것, 탈구된dislocated 것이기 때문이다.
‘틈’으로 역류하는 것
“눈은 영혼의 창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뒤에 영혼이 없다면 어떨까요? 만약 눈이라는 게 그걸 통해서 심연의 저승세계를 볼 수 있는 틈새일 뿐이라면요? 그 틈새를 통해 어두운 반대편을 볼 수 있죠. 쇼를 좌지우지 하는 숨겨진 힘이 있는 곳.”
- 다큐멘터리, <지젝의 기묘한 영화 강의 The Pervert’s Guide to Cinema>(2006, 소피 파인즈) 중, 슬라보예 지젝의 나레이션
영화에서 ‘콘티’라고 불리는 ‘컨티뉴어티 continuity’(연속성)는 현실감을 만들어내는 편집 방법을 지칭한다. 현실을 조각 조각 내어 찍었지만, 이음새를 전혀 느끼지 못하도록 매끈한 세계로 재현하는 관습이다. 사실 이러한 편집의 틈새를 메꾸는 건 보는 이들의 믿음과 환상이다. 즉 이데올로기이다. 어두운 공간에서 하나의 자리를 차지한 관객은, 자신의 위치에서 본 것을 현실 세계인 양 구현해 낼 수 있다. 카메라야말로, 영사기야말로 인간의 신체 중 눈을 특권화한 기계이다. 지젝의 ‘강의’에 따르면, 관객이 적극적으로 외면하는 틈새와 구멍의 의미는 어쩌면 어두운 반대편, 숨겨진 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지 모른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 틈새를 통해 억압한 본능이나 욕망의 잔여물이 역류할 수 있다고 본다. 너무 외설적이어서, 도덕을 위반하거나 죽음을 갈망하기 때문에 거부해 버린 실체의 무덤이다. 하지만 이 무덤에서 어느 날 괴물과 유령이 튀어나오는 것이 또한 스크린이고, 캔버스이고, 페이지이며, 칸이다. 꿈이며 ‘기묘한’ 환상이다. 임지현의 일련의 <검은 숲> 시리즈는 영화의 샷처럼 롱샷과 클로즈업이 이어져 자연스럽게 어떤 스토리텔링을 상상하게 하고, <극장>(2010), <배우>(2009)와 같은 그림은 연극의 장소를 보여준다. 모서리가 그려진 여기 이 무대 위에 흐물거리는 ‘배우’를 가지고 관객은 드라마를 그려낼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임지현은 어린 시절부터 만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캔버스가 하나의 ‘칸’으로 구성될 수 있을 지 실험해보고 싶어했다. 캔버스의 검은 프레임 만들기는 앞선 작업들이 영화의 씬, 연극의 무대를 끌어들인 것처럼, 만화라는 매체를 상상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낸다. 만화는 칸들이 이어지지만, 만화의 칸과 칸 사이의 ‘홈통’이라 불리는 경계가 존재한다. 홈통은 편집의 ‘컨티뉴어티’를 구성하면서 동시에 깨뜨리는 틈새이다. 이 틈새의 긴장을 즐기는 자들이 만화의 독자가 된다.
객체지향 존재론을 설파하는 레비 브라이언트는 이 틈새야말로 부분적으로만 자신을 드러낸 존재들이 ‘살아 가고’ 있는 지도라고 부를지 모른다. 현존하는 객체들은 시선의 여부와 상관없이 사각 지대에서 존재하고, 존재하기 때문에 고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 객체들은 자신을 모두 재현하지 않고 부분적으로만 드러내는 데, 레비 브라이언트는 이를 잠재적 존재의 국소적 표현이라고 부른다. 재현되지 않는 나머지가 틈새이고 구멍이다. 이 존재들은 무엇일까? 인간 중심주의의 사고와 시야로는 ‘전체’를 볼 수도 인지할 수도 없는, 그래서 철학의 이름으로 억압해온 존재들(객체)이다. 동물, 사물, 비인격적 존재이다. 돌멩이, 유리조각, 나뭇잎이거나 털뭉치일 수 있다. 꿀벌일 수도 있고 괴물, 유령일 수도 있다. 너무 미세하거나 너무 거대한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보고자 하는 의지를 떨어뜨려야 조금씩 느낄 수 있는 존재들일 지 모른다.
색과 구멍과 정치학
이번 ‘전시공간’에서 선보이는 ❮Unsaid 말하지 않은❯은 펜데믹의 시간을 지나면서 맞이한 사회적 ‘이슈’들을 이야기해 볼 수 있을지 제안한다. 코로나와 함께 심해진 아시안 혐오, 국내의 차별금지법 제정, 변희수 하사의 죽음을 둘러싼 일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낌과 동시에, 어떤 변화의 필요성을 감지한 것이다. 정치의 발언이 곧바로 작업으로 귀결될 수는 없지만, 사회적 의제는 이전보다 좀 더 기민하게 작업을 채워가게 만들었다. 세계의 구멍과 틈새는 더 많고 촘촘해졌고, 좀 더 노골적으로 ‘별’이 되어 반짝거린다. 무채색의 세계에 색이 더해졌다. ‘색’이라는 요소와 새로운 재료는 이제 탐구가 시작된 주제이다. 이 작업들이 무엇이 될지는 아직 단언할 수 없지만,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작업은 앞으로 작가의 방향을 짐작하는 단초가 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 ‘색’의 회화들은 앞선 리서치에 해당하는 책 작업과 함께 나란히 보아야 한다. 바로 『JE VOIS』 의 한 권인 「Black Monitor」이다. 이 책에는 그가 스크랩한 여러 신문 기사의 제목이 나열되어 있는데, 이 기사의 단어들은 시끄럽고 논쟁적이며 날카로운 정치성으로 날이 서 있다. 이 글자들은 검은 바탕에 회색으로, 마치 벽돌처럼 쌓여져 있어 물리적 견고함을 지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남한의 근대 이후, 식민지와 냉전의 시기를 지나며 중층적으로 쌓여진 모순의 덩어리들이 견고하게 쌓아 올려진 담처럼 느껴진다. 작가가 분명하게 이 담을 가시화한 이유는, 여러 색의 페인트를 부어 그것을 무너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임지현 작가는 자신만의 시간의 속도 속에서 색의 작업을 구현하고, 검정의 세계에 대한 논평을 펴나갈 것이다.
작가론 쓰기의 방법(-graphy)으로써 작가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지속되는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작가와 회화 작업, 이 둘 사이의 관계가 주체와 대상으로 고착화되지 않는 비평 방법이 있을까. 이런 방법이 작업과 작품, 전시 등 일련의 과정 속에 기입된 어떤 사회적, 환경적 반응을 덜어내지 않고, 회화를 수행하는 작가의 시간이 작품과 작품 바깥의 모든 요소를 연결하는 의미있는 용어가 될 수 있을까. 그런면에서 일견, 다양한 재료, 주제와 소재, 매체(회화, 드로잉, 조각, 설치와 책)를 다루는 작가 임지현에 대해서, 세계를 재현하려는 임무보다 대안적 이야기와 상상의 조건을 더해가려는 실천이 더 많이 부각되어 이야기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