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의 연습 Practice of Grey
GREY
완벽한 흰색과 완벽한 검은색을 찾는다는 건 회색을 더듬어 간다는 것이다.
주로 흑백 모노톤의 그림을 그렸다. 여러 종류의 연필과 펜으로 드로잉을, 세 가지 검은색 오일로 회화 작업을 했다. 검은색으로는 모든 단계의 표현이 가능하다. 짙은 어두움부터 흰 여백까지.
2015년에 그린 그림은 온통 검은색이었다.
2015년의 프로젝트
2015년 4월, 검은색, 회색, 흰색 세 가지 색을 책이라는 조각으로 표현하는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Black-Grey-White Sculpture》2를 제작했다. 100퍼센트의 검은색, 50퍼센트의 회색, 0퍼센트의 흰색을 입힌 책 세 권에는 Black, Grey, White라는 제목 외에 어떤 텍스트도 넣지 않았다. 그래픽 디자이너 Y와 상의한 뒤 처음 한 일은 세 가지 색을 띤 종이 찾기였다. Y는 “검은 종이가 다 검은 종이는 아닐 것”이라고 했는데, 국내의 큰 제지사 두 곳을 비롯한 총 세 곳에서 종이를 샅샅이 살펴보며 나는 그 말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흰 종이와 검은 종이의 종류는 다양했고, 비싼 가격을 치르면 내가 원하는 색과 근접한 색을 띤 종이를 구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50퍼센트의 회색을 찾는 일이었다. 회색 종이는 종류가 턱없이 적었는데 회색 종이가 책에 쓰이는 일이 과연 얼마나 있나 생각하면 당연했다.
결국 표지로 사용하기에 적절한 회색 종이는 찾지 못했다. 검은색 책과 흰색 책의 표지와 달리 회색 책의 표지는 흰 종이를 (내지에 사용한 회색 종이에 근접한) 회색으로 인쇄하여 만들었다. 가장 단순해 보이는 세 가지 색의 책을 만드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임을 알게 되었다.
2015년 10월, <사각의 숲>Blind Spot Forest전시를 위해 십단계의 흑백계조를 구현한 《Imaginary Structure》3를 제작했다.
흰 종이를 양장 제본해 책을 만든 다음 커버를 씌었다. 각 단계의 색을 입힌 커버였다. 인쇄술로 십단계의 색을 구현하는 일은 쉽지 않았고, 인쇄 담당자에게 흑백 인쇄가 가장 어렵다는 설명을 들었다. 작업으로서의 책을 제작하는 일은 여느 책에 비해 디테일에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고, 소량 제작은 인쇄소에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2016년, 출판물로서의 책을 처음 제작했다. 책의 형태를 빌어 입체 작업을 시작했던 이유는 내가 ‘책’이라는 매체와 형태에 매료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출판물을 제작하기 위한 동기 부여가 필요했기에 ‘UE8여름 워크숍’을 신청했고, 앞의 두 작업에서 이어지는 작업물이자 출판물로서의 책을 만들었다. 검은색
2016년에 그린 그림은 회색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진한 농도의 연필심으로 겹겹이 선을 긋다 보면 점점 짙은 색이 만들어지지만 연필로 그린 그림은 결코 검은색에 다가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대개의 경우 연필로 그린 그림은 회색에 가깝다.
한 워크숍에서 체험한 에그 템페라는 한 가지 색을 엷게, 여러 겹 올려서 짙은 색으로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검은색을 만들어 내려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마치 직조를 하듯 여러 겹의 회색 층을 쌓아 올려야 했다.
주로 유화를 제작하던 나는 이후 검은색 아크릴로 여러 점의 그림을 그렸다. 얇은 층을 표현하기에는 유화보다 아크릴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2017년 초 아크릴로 몇 점의 그림을 그렸지만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에그 템페라 기법을 접한 후 아크릴을 이용해 같은 방식으로 채색해 보면서 새롭게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PRACTICE of GREY
회색을 연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불어의 표현4
Page Grise 회색 페이지 : 인쇄가 선명하지 않은 페이지
La Nuit Tous Les Chats sont Gris 밤의 고양이는 모두 회색이다 : 밤은 차이를 지워버린다. 어둠 속에서는 사람을 알아볼 수 없다
영어의 표현5
A Grey Problem a problem where the causing technology is unknown or unconfirmed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안다’와 ‘나는 모른다’를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가는.
나는 후자이다.
Page Grise는 ‘인쇄가 선명하지 않은 페이지’로 통용되고 있는 듯하지만, ‘선명한 회색 페이지’일 수도 있다.
나는 회색을 탐구하고 있다. 회색은 검은색과 흰색에서 동떨어져 있지 않으며, 홀로 있지 않다. 언제나 무언가의 사이에 있으며, 검은색과 흰색 또한 극단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믿지 않더라도.
1. 2015년 5월9일에서 23일까지 반지하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다. 주위에 거의 알리지 않아 작가와 반지하 관리자 두 명 포함 총 관람객은 10명 이내로 추정된다. http://vanziha.tumblr.com/tagged/project/page/2 반지하 서른세 번째 프로젝트.
2. 1.을 위해 제작했던 첫 번째 책 작업이다. http://imjihyun.com/work/6
4. 두산동아 불한사전 2006년 제 2판 4쇄 참조
5. https://en.wikipedia.org/wiki/Grey_problem